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는 극한의 생존 환경, 아우슈비츠에서 하위 욕구조차 충족되지 않은 상황에서도
극 소수에 사람들은 의미, 사랑, 신념, 초월적인 목적을 붙잡고 삶을 지속했다. 어떻게 그렇게 할수있었을까?
그 답은 말그대로 의미, 사랑, 신념, 초월적인 목적이 삶의 원동력 자체이기 때문이다.
1. 극한 상황 속 인간의 반응
- 수용소 입소 직후 사람들은 대부분 “곧 풀려날 것”이라는 환상을 가진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고, 극심한 충격 상태에 빠진다.
- 변화는 정신적 무감각. 감정이 마비되고, 고통에 익숙해지며, 무덤덤하게 받아들이게 된다.(욕구 만족은 어느 정도 조절 가능)
"아우슈비츠 수감자들은 첫 번째 단계에서 충격을 받은 나머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됐다. 며칠이 지나면 가스실조차 더 이상 두렵지 않게 된다. 오히려 가스실이 있다는 사실이 사람들로 하여금 자살을 보류하게된다"
- 정작 참기 힘든 것은 육체의 고통이 아니라, 부당함에서 오는 모멸감과 정신적 고통이다.(더 상위적 욕구라는걸 반증)
- 그렇기에 사람들은 유머, 유대를 통해 순간의 고통을 이겨내기시작한다.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사회 형성가능)
자기 자신은 물론이고 서로를 재미있게 해 주려고 그야말로 안간힘을 썼다. 어쨌든 샤워기에서 정말로 물이 시원하게 쏟아지고 있지 않은 유머는 그 어떤 상황에서도 그것을 딛고 일어설 수 있는 능력과 초연함을 가져다준다
2. 희망 = 생존의 원동력
프랭클은 강의실에서 강의하는 자신을 상상하며 고통을 넘긴다.
매일같이 시시각각 그런 하찮은 일만 생각하도록 몰아가는 상황이 너무 역겹게 느껴졌다. 나는 생각을 다른 주제로 돌리기로 했다. 갑자기 나는 불이 환히 켜진 따뜻하고 쾌적한 강의실의 강단에 서 있었다. 앞에서 청중들이 푹신한 의자에 앉아 내 강의를 경청하고 있었다. 이런 방법을 통해 나는 어느 정도 내가 처한 상황과 순간의 고통을 이기는 데 성공했고, 그것을 마치 과거에 이미 일어난 일처럼 관찰할 수 있었다. 감정, 고통스러운 감정은 우리가 그것을 명확하고 확실하게 묘사하는 바로 그 순간에 고통이기를 멈춘다.
반대로 미래에 대한 희망을 잃은 사람은 급격히 무너지게 된다.(희망 설정의 중요성1)
3월 29일, F는 갑자기 아프기 시작했고 열이 아주 높게 올랐다. 3월 30일, 예언자가 그에게 말해 주었던 것처럼 그에게서 전쟁과 고통이 떠나갔다. 헛소리를 하다가 그만 의식을 잃은 것이다. 3월 31일에 그는 죽었다. 사망의 직접적인 요인은 발진 티푸스였다.
자살을 시도하는 사람들이 전형적으로 내세우는 것, 즉 삶으로부터 아무것도 기대할 게 없다는 것이었다.
해방 후 수감자들은 기대했던 감격과는 다른 공허함과 환멸을 경험합니다.(안정 영역에 대한 희망 설정에 위험성)
거기에서 아무런 감흥도 느낄 수 없었다. 처음으로 불꽃 튀는 육체는 마음보다 거부감이 적은 법이다. 엄청난 정신적 억압을 받다가 갑자기 풀려난 사람은 도덕적, 정신적 건강에 손상을 입을 위험이 크다. 정작 자유를 얻은 후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실업, 가난, 혹은 안정 영역에 대한 과한 욕심)슬프다! 마침내 자유가 실현됐을 때, 모든 것이 자기가 꿈꾸어 오던 것과 너무나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된다.
3. 성장 영역에 대한 올바른 목표 설정이 중요하다.
이책을 통해서 제대로된 희망을 설정함으로써 힘든 역경을 이겨내는 동시에 큰 절망에 빠질수도 있다는걸 알게되었다.
1) 이룰수 없는 목표를 설정하는 것은 절망에 빠지기 쉽다.
2) 목표를 이루면 끝나는 희망을 가지면 길을 잃게 될수있다.
3) 안정 영역에 대한 만족은 끝이 없다. 해당 사항을 궁극의 목적으로 설정하면 불행에 빠지기 쉽다.
4) 구체적인 상상을 통해서 절망에서도 고통을 이길수있어야한다.